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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벌써 봄인가? 春來不似春

잡담

by 청정뉴스 홈페이지 공사중 2023. 2. 1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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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월 날씨

 

 

아...벌써 봄인가?

 

봄은 왔지만 봄같지 않네.

 

 

 

중국 전한(前漢) 11대 황제 원제(BC74~BC33) 건소 원년(BC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린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 본명 왕장(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된다.

 

황제는 수천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 뇌물을 바쳤다.

하지만 왕소군은 집안이 비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렸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원제 경녕 원년(BC33), 남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한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한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넑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한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명을 택하려고 했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한다.

 

 

호한야는 한 미녀를 지목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미녀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한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낸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엥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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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은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 떨어질 낙, 기러기 안)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왕소군은 흉노의 왕 선우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살다가

 

선우가 죽자 그의 아들이 왕우에 올랐는데

 

흉노의 풍습에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이이받게 되어 있었다 한다.

 

왕소군이 아들에게 물었다.

 

 

흉노의 풍속을 따르겠는가?

한나라의 풍속을 따르겠는가?

 

 

선우의 아들은 흉노의 풍속을 따르겠다고 대답했으니,

 

어머니를 아내로 데리고 살겠다고 한 것이다.

 

그말을 들은 왕소군은 음독하여 자살했다.

 

 

왕소군이 죽자 장례를 치렀는데,

 

원래 흰 풀만 나던 호지(胡地)에서

 

왕소군의 무덤에서만 푸른 풀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푸른무덤을 청총(靑塚)이라 불렀다.

 

 

동방규(東方叫)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지역에는 화초도 없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더랍니다.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스레 허리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몸매 관리 때문이 아니랍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예전에 한 정치인이 써먹어서 유명해진 문구인데 바로 이 시에서 유래한다. 시의 주인공 왕소군은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에 꼽히는데, 비운의 여인으로 유명하다.
때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시대. 한나라는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후궁을 흉노의 추장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쁜 후궁을 주기는 아까워서 그 중 가장 못생긴 자를 선택하기로 하였다. 원제는 평상시에 가까이 할 후궁을 고르기 위해 화가인 모연수(毛延壽)에게 초상화를 그려두게 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자 모두들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쳐 예쁘게 그려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왕소군은 뇌물을 쓰지 않았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모연수는 실물보다 훨씬 못생기게 그렸다. 초상화를 보고 선택한 후궁이 바로 왕소군. 떠나보내는 날 실물을 본 원제는 그 미모에 가슴을 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화가 난 원제는 모연수를 처형하고 말았다.

흉노 추장에게 시집간 왕소군은 늘 고국 한나라를 그리며 시름에 쌓여 몸이 야위고 허리띠가 느슨해졌다. 보통의 여자들 같으면 날씬한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하느라고 그렇다고 하겠지만 자신은 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시의 속뜻이다. 이 비운의 여인을 위해 후대에 이백(李白)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들이 그를 애석해하는 시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동방규의 이 작품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특히 '춘래불사춘' 못지 않게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도 옛날에 언어 유희로 많이 회자(膾炙)되던 구절이다.

 

地無花草 호지무화초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고 하나,

오랑캐 땅엔들 화초가 없을까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라마는

오랑캐 땅이라서 화초조차 없구나




漢道方全盛 (한도방전성)

朝廷足武臣 (조정족무신)

何須薄命妾 (하수박명첩)

辛苦事和親 (신고사화친)

昭君拂玉鞍 (소군불옥안)

上馬涕紅頰 (상마체홍협)

今日漢宮人 (금일한궁인)

明朝胡地妾 (명조호지첩)

掩淚辭丹鳳 (엄루사단봉)

含悲向白龍 (함비향백룡)

禪于浪驚喜 (선우랑경희)

無復舊時容 (무복구시용)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萬里邊城遠 (만리변성원)

千山行路難 (천산행로난)

擧頭惟見日 (거두유견일)

何處是長安 (하처시장안)

 

 

한나라는 융성한 때여서

조정에는 무신들이 많이 있는데

어찌하여 박명한 여인에게

슬프고 괴로운 화친을 시키나

소군이 구슬 안장 추어올려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는 눈물이 흐르네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 땅의 첩이로구나

눈물을 가리고 궁궐을 떠나

슬픔을 머금고 백용구로 나아가네

선우는 놀라며 한없이 좋아하지만

다시 옛 모습은 돌아오지 않으리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짐은

몸매를 관리해서가 아니라네

만 리 밖 멀고 먼 변방의 성에

첩첩산이라 가는 길 험난하네

머리 들어 해를 바라볼 뿐이니

어느 곳이 장안이런가

 

동방규, 소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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